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를 클라우베르크 (문단 편집) == 만행 == 그는 방부제로 쓰는 포르말린이나 마취제로 사용하는 노보카인을 '''여성의 나팔관에 주사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이 실험에 참가한 여자들은 자궁이 타들어가는 고통을 겪었지만 가스실에 들어가지 않기 위해 실험에 적극 협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담으로 [[힘러]]는 이 방법을 매우 칭찬했다고 한다. 그는 '''마취제 없이 여성의 자궁 안에 산을 투입시키거나, 난소를 떼어내고 엑스레이를 연속으로 찍는 이른바 X선 실험'''을 해서 수용소 여성 포로들의 난소는 실험에 무자비하게 활용되었다. 게다가 여성의 난소의 화학적 반응을 확인하기 위해 압력실에 여성 포로들을 집어넣고서 남자들에게 [[성관계]]를 강요했고 이 때를 포착해 카를 클라우베르크는 이들의 성관계 장면을 엑스레이 촬영하기도 했다. 한편 클라우베르크는 여성이나 남성의 성기에 무척 관심이 많았고, 포로들을 가스실에서 죽이기 전에 '''그들의 성기를 반드시 잘라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이유가 [[https://www.sciencetimes.co.kr/?news=%EC%9D%B8%EC%B2%B4%EC%8B%A4%ED%97%98-%EC%9E%94%ED%98%B9%EC%82%AC-%ED%9E%88%ED%8B%80%EB%9F%AC%EC%9D%98-%EC%9D%98%EC%82%AC%EB%93%A414|또 다른 생체 실험을 하기 위해서였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클라우베르크의 생체실험 희생자 수가 현재 확인된 숫자만 약 700명이나 된다고 추산된다. 그러나 소련군의 침공으로 그는 라펜스뷔크 수용소로 연구소를 옮겼고 종전 후 소련군에게 잡혀 23년형을 선고 받았으나, 7년 후에 서독과의 포로 교환 합의로 풀려났다. 그렇게 [[인생의 승리자]]가 되나 싶었지만 클라우베르크는 서독에서 어이없게도 자신이 했던 생체실험을 자랑하는(!) 행동을 하고 다녔다. 이에 분노한 생존자들이 그를 고소하여 클라우베르크는 1955년 체포되었으나 재판 전에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말았다. 일각에서는 그가 재판을 받기 전에 자살했다는 주장도 있다. [[분류:제1차 세계 대전/군인]][[분류:독일 제국의 군인]][[분류:나치당원]][[분류:1898년 출생]][[분류:1957년 사망]][[분류:슈투름압타일룽/인물]][[분류:친위대(나치 독일)/인물]][[분류:독일의 의사]][[분류:심혈관질환으로 죽은 인물]][[분류:심장마비로 죽은 인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